IT WAS EVIDENT THAT COLOURS AND FORMS HAD A SIGNIFICANCE
FOR STRICKLAND THAT WAS PECULIAR TO HIMSELF
— W. Somerset Maugham, The Moon and Sixpence (1919)
© 2025 Woohyun.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taeho9raphy
IT WAS EVIDENT THAT COLOURS AND FORMS HAD A SIGNIFICANCE
FOR STRICKLAND THAT WAS PECULIAR TO HIMSELF
— W. Somerset Maugham, The Moon and Sixpence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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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 Somerset Maugham, The Moon and Sixpence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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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대로 일어나 차를 끓였고 선반에 놓인 그릇들을 정리했다. 회색 그릇은 물기가 전부 말라있어 씻긴 기억조차 없는 듯했다. 넓게 펼쳐진 창문으로 다가서니 찬 기운과 함께 햇살이 느껴졌다. 딱 이런 날씨였다.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앙상해진 나무가 힘껏 흔들리는 차갑고 쌀쌀한 날씨. 진아는 꼭 이런 날에 창문을 열었다. 춥다고 불평하는 내게 찬바람을 맞으면 붓기가 빠진다며 난간에 서서 입을 크게 벌리곤 했는데. 나는 손을 뻗어 창문을 반쯤 열었다. 서늘한 한기가 목구멍 안쪽까지 닿는 것 같았다. 차를 마시려 컵을 들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코 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빠르게 안경을 감싸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흐려진 세상은 왜인지 더욱 깊은 숨을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붓기가 전부 빠져나갈 정도의 깊은 숨을 여러 번 들이마시고 내뱉던 순간,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라면이었다.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지난주에 먹은 육개장이 아닌 라면 육개장. 곧바로 주방으로 가 냄비를 꺼내들었다. 멍하니 물이 끓어오르길 기다리는데 자꾸만 진아가 떠올랐다. 흰 색의 국화꽃 사이에 놓인 진아는 가만히 웃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울음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멈춰 있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바지를 꽉 꼬집었다. 무언가 터져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선 손에 힘을 꽉 쥐어야만 했다. 자리에 앉아 손에 힘을 살며시 풀고 있을 때 눈 앞에 일회용 접시가 놓였다. 검은색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육개장을 들고 왔다. 무거운 침을 삼키고 한 숟갈을 떴다. 고사리나 소고기같은 것들이 육중하게 씹혔지만 목에 무언가 단단한 벽으로 막혀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았다. 분명 혀에 닿고 씹고 있는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무언가 참고 있던 것이 터져나왔다. 나는 빨간 국물 위로 짭짤한 눈물을 떨어뜨렸다. 순간 치이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끓어오른 물이 냄비를 넘어 밖으로 빠져나오는 소리였다. 불을 줄이고 스프와 함께 면을 넣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물이 끓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비해 라면은 비교적 빠르게 완성되었다. 나는 찬장을 열어 회색 그릇을 꺼내 라면을 담았다. 면발을 들어올리자 집 안의 한기 탓인지 김이 피어오르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다시금 눈이 흐려졌다. 라면은 그날 먹었던 육개장이 무안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허겁지겁 젓가락을 휘젓다보니 어느새 면발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제서야 진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국물만 남은 그릇을 싱크대에 놓고 물을 틀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이탈한 적 없었던 것처럼. 흘렸던 눈물은 그대로 증발해 사라졌고, 퉁퉁 부었던 눈도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왔다. 물기를 머금었던 그릇에도 다시금 밥이 채워졌다. 그런 것이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 그래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설거지를 마치고 창문 앞에 다시금 섰다. 적응되지 않는 찬 공기가 여전히 몸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젖히고 팔을 벌려 느린 심호흡을 했다. 순간 생각했다. 어떤 기억은 긴 숨과 함께 입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긴 숨, 강우진
긴 숨
In One Long Breath
긴 숨 In One Long Breath
강우진 Kang Woo Jin
안종욱 Ahn Jong Uk
0:00/1:34
2025
Oil on canvas
Kang’s Archive 2025
No.31
2025
Oil on canvas
2025
Oil on canvas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대로 일어나 차를 끓였고 선반에 놓인 그릇들을 정리했다. 회색 그릇은 물기가 전부 말라있어 씻긴 기억조차 없는 듯했다. 넓게 펼쳐진 창문으로 다가서니 찬 기운과 함께 햇살이 느껴졌다. 딱 이런 날씨였다.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앙상해진 나무가 힘껏 흔들리는 차갑고 쌀쌀한 날씨. 진아는 꼭 이런 날에 창문을 열었다. 춥다고 불평하는 내게 찬바람을 맞으면 붓기가 빠진다며 난간에 서서 입을 크게 벌리곤 했는데. 나는 손을 뻗어 창문을 반쯤 열었다. 서늘한 한기가 목구멍 안쪽까지 닿는 것 같았다. 차를 마시려 컵을 들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코 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빠르게 안경을 감싸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흐려진 세상은 왜인지 더욱 깊은 숨을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붓기가 전부 빠져나갈 정도의 깊은 숨을 여러 번 들이마시고 내뱉던 순간,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라면이었다.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지난주에 먹은 육개장이 아닌 라면 육개장. 곧바로 주방으로 가 냄비를 꺼내들었다. 멍하니 물이 끓어오르길 기다리는데 자꾸만 진아가 떠올랐다. 흰 색의 국화꽃 사이에 놓인 진아는 가만히 웃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울음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멈춰 있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바지를 꽉 꼬집었다. 무언가 터져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선 손에 힘을 꽉 쥐어야만 했다. 자리에 앉아 손에 힘을 살며시 풀고 있을 때 눈 앞에 일회용 접시가 놓였다. 검은색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육개장을 들고 왔다. 무거운 침을 삼키고 한 숟갈을 떴다. 고사리나 소고기같은 것들이 육중하게 씹혔지만 목에 무언가 단단한 벽으로 막혀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았다. 분명 혀에 닿고 씹고 있는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무언가 참고 있던 것이 터져나왔다. 나는 빨간 국물 위로 짭짤한 눈물을 떨어뜨렸다. 순간 치이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끓어오른 물이 냄비를 넘어 밖으로 빠져나오는 소리였다. 불을 줄이고 스프와 함께 면을 넣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물이 끓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비해 라면은 비교적 빠르게 완성되었다. 나는 찬장을 열어 회색 그릇을 꺼내 라면을 담았다. 면발을 들어올리자 집 안의 한기 탓인지 김이 피어오르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다시금 눈이 흐려졌다. 라면은 그날 먹었던 육개장이 무안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허겁지겁 젓가락을 휘젓다보니 어느새 면발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제서야 진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국물만 남은 그릇을 싱크대에 놓고 물을 틀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이탈한 적 없었던 것처럼. 흘렸던 눈물은 그대로 증발해 사라졌고, 퉁퉁 부었던 눈도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왔다. 물기를 머금었던 그릇에도 다시금 밥이 채워졌다. 그런 것이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 그래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설거지를 마치고 창문 앞에 다시금 섰다. 적응되지 않는 찬 공기가 여전히 몸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젖히고 팔을 벌려 느린 심호흡을 했다. 순간 생각했다. 어떤 기억은 긴 숨과 함께 입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긴 숨, 강우진
긴 숨
In One Long Breath
Kang’s Archive 2025
#No.
No.31
긴 숨 In One Long Breath
강우진 Kang Woo Jin
안종욱 Ahn Jong Uk

0:00/1:34
긴 숨 In One Long Breath
강우진 Kang Woo Jin
안종욱 Ahn Jong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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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숨 In One Long Breath
강우진 Kang Woo Jin
안종욱 Ahn Jong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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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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